보름도 더 전에 메신저에서 지인분들이랑 이야기하다가 그분들과 함께 구요안 구여친 사진을 보다가 그 구여친에 대한 이야기를 했더랬다.
그러다가 '헤어진 옛 애인을 못잊고 계속 상처에 허덕이는 남자'이야기를 하면서 설마 구요안도 그런 순정남인가 ㄱ-)하며 지인분들과 설마 설마 하고 있었는데 ㅋㅋ
(실제로 요안이 읽고 있었다던 '라 콩솔랑트'라는 책도 아주 간단히 요약하자면, 현재 애인과의 사이가 좀 소원해진 상태에서 첫사랑의 부고를 접하고 그 사람에 대한 기억과 죄책감에 허덕이던 남자가 새로운 여인과의 만남으로 인해 '위로'를 받게 된다는 요지의 이야기다. 물론 요안은 그 책이 베스트셀러라서 읽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요안이 그 책을 너무 열심히 읽길래 ㅡ.ㅡ)
내가
- 솔직히 그런 순정남 맘에 안들고 내 취향도 아니지만 정말 요안이 그렇다해도 전 안깔래요
라고 말했더니 그 말을 들으신 지인분들이
-찌질이라고 깔줄 알았는데 의외네여
라고 ㅋㅋㅋ하셨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블로그에선 티 안내지만 나는 지인분들과 이야기할때는 구요안을 몹시 까는편이다. 다들 구요안보고 되도않는 걸로 겁나 까인다고 불쌍하다고 입을 모을 정도....<)
물론 ㅋㅋ 평소같았으면
-어휴 찌질이 ㅉㅉㅉ 3년넘게 지났는데 정말 구여친을 못잊고 있는거야?
이러면서 확인도 안된 추측을 갖고 깠겠지만...
내가 순정남들을 까지 못하는건 나도 잊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내 친구들은 영화같다 라고 좋아했지만 본인의 입장에선 그저 시트콤이었을뿐
2007년 12월 나는 혼자서는 처음으로 한국과 영국 외의 다른 곳으로 여행을 갔었다. 행선지는 포르투갈에 도착지는 포르투갈 포르투였고 도착하던 12월 16일은 일요일이었다.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않은 유럽의 일요일 아침은 상상외로 매우 조용했고 나는 환승하기 겁나서 호스텔 스탭이 알려준 지하철역에서 내리지 않고 내 멋대로 내렸다가 길을 잃은 상태였다.
그날 새벽 6시 반에 이륙하는 저가항공을 타기위해 런던 스텐스테드 공항에서 노숙을 하고서 포르투같이 언덕이 많은 곳에서, 또 큰 대로변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길이 아스팔트가 아닌, 돌을 하나하나 박아 만든 길에서 캐리어를 끄느라 지친 상태였지만 호스텔을 찾아서 체크인을 하기 전까지는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호스텔 부근에 와서도 여전히 호스텔을 못찾은 채로 한손에는 캐리어를 쥐고 한손에는 지도를 쥐고 길에 서있던 나에게 (난 심각한 길/방향치다) 어떤 남자 두명이 말을 걸어왔다. 나는 순간 호스텔 삐끼인가 싶어서, 또 말도 안통하는 낯선 곳에서의 자연스런 방어기제로 그들의 모습을 살폈다. 한명은 라틴계의 모습이었지만 다른 한명은 벽안의 블론드의 남자였다. 일단 나에게 '포르투갈어 티가 하나도 안나는' 영어로 말을 걸어온 남자는 후자였고 나에게 어느어느 호스텔을 찾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했더니 그 남자는 길을 가르쳐 주고는 자기들 갈 길을 갔다.
나는 그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호스텔을 찾아 체크인을 할수 있었고 그날 오후는 피곤해서 일찍 호스텔로 들어와 리빙룸에서 일기를 쓰고 있었다. 일기를 쓰던 나를 누가 뒤에서 아는 척해서 돌아봤더니 나에게 길을 가르쳐준 그 블론드의 사람이었다.
그 사람과 나는 호스텔에서 만난 여행자들이 으례 그렇듯 어디에서 왔느냐, 이 도시의 인상은 어떠냐, 어디를 가봤느냐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 사람은 핀란드 헬싱키에서 왔고 그 해 말까지 포르투갈에 있다가 그 후에 남미로 가서 남미여행을 할 거라고 했다. 그렇게 몇마디를 나눈 후 나는 그날 몹시 피곤했기 때문에 그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방에 올라가 잠이 들었다.
나는 유럽을 여행하는 배낭여행자들이 흔히 선택하는, 이층침대로 이루어진 호스텔 믹스룸(남녀가 같이 쓰는)을 예약했고 나는 6인실에서의 이층침대 3개중 하나의 2층을 쓰게 되었다.
그렇게 14시간을 한번도 깨지않고서는 다음날 아침 7시에 잠이 깨서 씻으려고 침대에서 내려와서 내 아래층에는 누가 있나 보니 나에게 길을 가르쳐준 그 사람이 자고 있었다. 나름 참 신기했다.
그 후로는 거의 매일이 비슷했다. 내가 아침에 먼저 일어나서 씻고 방으로 돌아오면 그 사람이 깨있고 아침인사를 하는, 오늘은 뭐할거냐고 묻는 흔한 배낭여행자들의 인사.
여행 두번째 날에 나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포르투에 다녀오신 분들은 포르투의 야경이 그렇게나 아름답다더라며 꼭 볼것을 추천해주셨지만 나는 혼자고 또 유럽의 겨울은 해가 빨리져서 혼자 야경을 보러 나갈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지금 다시하라면 절대 못할 짓을 했다. 나는 작은 종이에 '꼭 야경을 보고 싶은데 나는 혼자 여행와서 혼자 나가기가 좀 그래요 나랑 야경보러 같이 갈래요? 거절해도 괜찮아요'라고 써서 그 사람의 베개 위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그 쪽지를 쓸 당시에 그 사람은 저녁을 먹고 있었고 나는 쪽지를 써놓고는 리빙룸으로 내려와 인터넷을 하고 있었다. 한시간쯤 지났을까 그 사람이 인터넷을 하고 있던 내게 와서는 내게 쪽지 봤다며, 자신은 언제든지 좋으니 네가 좋은 시간에 말을 하라고 하고는 내 손에 쪽지를 쥐어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긴 일이긴 한데 우리는 그때까지 서로의 이름을 몰랐다. 편지에 써놓은 서로의 이름으로 그렇게 통성명을 했다.
어쨌든 그렇게 그 다음 날 저녁에 그 사람과 나, 그리고 같은 방을 쓰던 한국인 아저씨와 일본인 남학생 이렇게 넷이서 포르투 강변으로 야경을 보러나갔다. 그날 비가 왔었고 같이 나간 분들은 남자라 모자를 쓰거나 후드를 쓰거나 했지만 나는 우산을 쓰고 있었고 그래서 사진찍기가 힘들었었다. 그해 겨울 포르투에는 포르투갈인가 유럽에서 가장 큰 크리스마스 트리가 있었고 나는 그 사진을 찍고 싶어서 그 사람에게 우산을 부탁하고는 미리 봐둔 자리로 뛰어가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사람은 꽤 친절하고 꽤 괜찮았다. 내가 그 사람에게 우산을 맡기고 사진을 찍고 있을때도 조용히 내 뒤로와 우산을 씌워주고는 했다. 그리고 그날 나와 일행들은 함께 저녁을 먹고 시끄럽게 떠들며 길을 걷고 함께 호스텔로 돌아와 굿나잇인사를 하고 잠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람은 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친절을 베풀었을 사람이지만 어쨌든 그 덕분에 3박4일이었던 나의 포르투에서의 일정은 일주일로 늘었다.
그 일주일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지
다른 여행자들이랑 술마시러 바에 갔다가 둘이서 나와서 새벽 1시에 포르투 대로변에서 시끄럽게 떠들던 일 (그 여행에서 사실 난 술안마신 날이 없었다) 잠결에 알람 맞춰둔 폰을 침대 2층에서 내던졌다가 아침에 일어나서 폰을 찾던 날 보고서는 그사람이 폰을 찾아준 일 여행자들과 술마시며 20도가 넘는 포트와인에 쩔어있던 나에게 그 사람이 그만 마시라며 내 손에서 와인잔을 가져간 일 (지금 생각해보니 이건 좀 무례하긴 하다)
남들에겐 별것 아닌 사소한 것이겠지만 3년이 다되어가는 지금도 내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는 모습들.
함께 아침 산책을 가서는 바람에 날려 머리 산발된 내 모습을 찍던 그의 모습. 침대 앞 의자에 앉아 얼굴에 로션을 바르고 있던 나를 보며 지그시 웃던 그 모습. (지금 생각하면 무슨 자신감이 있어서 그때 쌩얼로 그사람에게 다시 웃어줬는지-_-;) 추워서 쇼핑가서 모자를 사서 쓰고 온 나에게 잘 어울린다고 말하던 모습. 읽고 있던 파울로 코엘류의 책을 다 읽었다며 나에게 기쁘게 말하던 그 모습. 나는 열아홉인데 당신은 몇살이냐 계속 묻던 나에게 자신은 늙었다며 서른이라 말하던 그의 모습. 비행기를 타고 가면 빠르고 좋을텐데 왜 굳이 배를 타고 남미로 가려고 하냐는 나의 질문에 'My heart told me to do so'라고 대답하던 그의 모습.
그러다 나는 포르투에서의 마지막 날 밤에 내 감정에 너무 솔직해져 버렸다. 그 다음날 아침 11시 기차로 리스본으로 떠나야했던 나는 다른 여행자들과 함께 마시기 위해 포트와인을 몇병 사왔고 그걸 한잔씩 따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주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와인을 컵에 따라 주자 그 사람은 요즘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안마시려고 한다 라며 거절했다.
뭐 어때 거절할수도 있는거지 아냐 그래도 안마셔도 들고만 있어도 되잖아 예의라는게 있지 라는 생각이 엎치락 뒤치락하던 나는 괜히 화가나서 머그컵에 20도 짜리 포트와인을 콸콸 부어 두잔을 원샷했다. (저건 소주를 머그컵에 가득따라 원샷 두번한 것과 같다 소주는 17도인가 15도 밖에 안되니 오히려 소주보다 쎌지도)
그리고 그때 마침 지인분께 문자가 왔다. 런던에 지금 도착했다고. 보고싶으니 빨리 여행에서 돌아오라고 하는 문자.
뭔가 나는 그때 욱했었던것 같다. 문자 확인과 동시에 나는 호스텔 정원으로 나가서 벤치에 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줄줄 울고있는데 누가 옆에 앉아서는 울때 누군가가 옆에 있는게 싫으냐고 묻는다.
또 그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거 상관안한다고 옆에 있어도 된다고 말했다.
나는 민망하다 이런거 없이 계속 훌쩍훌쩍 울었고 그런 나에게 그 사람이 물었다. 엄마가 보고 싶어 우는거냐고.
나는 피식 웃으며 우리 엄마는 우는게 내면이 약하다는 의미라고 생각해서 내가 우는거 싫어한다 라고 말을 하니 그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울고 싶을때 울수 있는건 행복한 일이라고, 감정이 굳어져버리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정확히는 stoned라는 단어를 썼었다)
그러면서 파울로 코엘류의 연금술사에 나오는 구절을 읊어줬었다. (그 말은 그 다음날 내가 술깨니 생각이 안나고 지금도 생각이 나지않아 그 사람 본인 외에는 무슨 구절을 말했는지 영영 모르게 되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감정에 너무나 솔직해져 -내일 내가 포르투를 떠나면 우리가 다시 만날수 있을까요 라고 물었고
그 사람은 당연히 다시 만날수 있을거라며 자신이 남미 여행후에 아시아 여행을 생각하고 있는데 만약 한국에 정말 가게되면 네가 가이드를 해주면 되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그러고서는 서로 메일 주소를 교환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또 다른 일요일날 아침에 나는 리스본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일찍 체크아웃을 해야했다. 나는 그 사람에게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최대한 기다렸지만 그는 평소보다 늦게까지 자는지 리빙룸으로 내려오지 않았고 나는 결국 인사를 하지 못한채 포르투를 떠났다.
그날 포르투에서 리스본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정말 서럽게 울었던 기억이 난다
어쩌면 난 그 짧은 시간에 그 사람을 좋아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마지막 날 밤에 난 그 사람이 날 그냥 어린애로 보는구나 하는걸 알았지만 그 사람은 나보다 11살 많았으니. 그땐 괜히 야속한 마음만 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는 수긍이 가기도 하고 또 이런 로맨티스트가 제일 위험한 사람들이야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와 아침 산책을 하던 날에 서로의 별자리 이야기를 하다가 그 사람이 자신의 생일은 7월 29일인데 내 생일은 7월 28일이라는 것을 알고는 내년 그러니까 2008년 7월 28일에 포르투에서 지금의 숙소에서 다시 만나서 생일파티를 하자 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그 말이 농담이었는지 진심이었는지 나는 모른다. 그의 말이 진심이었든 농담이었든 나는 2008년 내 생일날 포르투에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영국으로 돌아와서 한달정도 그 사람과 메일을 주고 받았었다. 그런데 내 네이버 메일 계정에서도 에러가 나서 발송이 안된 메일이 수신확인으로 나오고 그 사람이 있는 남미의 인터넷 사정도 좋지 못해서 이런저런 이유로 쌍방향에서 답장이 늦어지다가 결국은 나는 답장을 하겠다는 마음도, 메일을 다시 보내봐야겠다는 마음도 접었다. 그래서 지금은 그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른다.
내게 한국어로 I love you를 어떻게 말하냐고 물어서 내가 왜 그걸 묻냐고 물었더니 '나중에 한국 여자랑 사랑에 빠지면 그 여자에게 그렇게 이야기해주려고' 라거나
남미에서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게 되면 남미에 눌러 살거라는 말을 하던 사람이니
지금쯤 정말 한국인 여자와 사랑에 빠졌거나 남미에서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것도 확실하지는 않지.
하지만 언제 어디선가 그 사람을 다시 만날 기회가 생긴다면 당신은 그 때 이후에 한번이라도 내 생각했냐고, 그런적 있냐고 묻고 싶다
이런 나이기에 순정남들, 아니 요안이 정말로 구여친을 못잊고 허덕이고 있는 거라고 해도 깔수가 없는 것이다.
고작 일주일 함께 있었던 사람도 이렇게 기억에 남는데 몇년을 함께한 사람을 어떻게 쉽게 잊겠는가
문제의 울고짜고 사건이 있던날 찍은 사진. 내가 묵었던 그리고 울고짜고하기 몇시간전 호스텔 테라스에서 본 포르투 구시가지와 대성당.
리스본으로 떠나던 날 기차역으로 가다가 포르투의 가장 큰 대로인 알리아두스 대로에서 찍은 기마상. 저날 하늘은 유난히 파랬었다
이건 포르투를 떠나 리스본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찍은 대서양
이건 리스본에서 리스본 근교의 카스카이스로 가던 완행열차에서 찍은 대서양의 노을 하루만에 참 많은 생각을 했었다